진대법
고국천왕 때 시행한 구휼 제도로, 당시 을파소가 국상으로 있었어요. 진대법은 흉년이 들거나 봄에 먹을 것이 없을 때 나라에서 백성에게 곡식을 빌려주고 수확한 후에 갚도록 한 제도예요. 이처럼 봄에 양식을 빌려주고 추수기에 갚는 제도(춘대추납)는 이후 고려, 조선에서도 운영되었습니다.
고구려는 4세기 후반 소수림왕이 국가의 기틀을 다진 후 4세기 말 ~ 5세기 광개토 태왕과 장수왕 때 영토를 크게 넓히며 전성기를 맞이하였어요. 광개토 태왕은 남으로 백제를 압박하고, 신라를 도와 신라에 침입한 왜를 물리쳤으며, 거란과 후연 등을 격파하고 요동과 만주 일대를 장악하였습니다. 그력 확대의 자신감을 바탕으로 광개토 태왕은 '영락'이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였어요. 광개토 태왕의 아들 장수왕은 수도를 국내성에서 평양으로 옮긴 후 본격적으로 남진(남하) 정책을 펼쳐 한강 유역을 차지하고 영토를 확장하였어요. 이러한 대외 팽창을 통해 동아시아에서 고구려의 위상이 높아졌어요.
(영략) 9년(399) 기해에 백제가 서약을 어기고 왜와 화통하므로, 왕은 평양으로 순수해 내려갔다. 신라가 사신을 보내 왕에게 말하기를 "왜인이 그 국경에 가득 차 성을 부수었으니, 노객(신라 내물 마립간)은 백성된 자로서 왕에게 귀의하여 분부를 청한다."라고 하였다. (중략) 10년(400) 경자년 왕(광개토 태왕)이 보병과 기병 5만을 보내 신라를 구원하게 하였다. 남거성을 거쳐 신라에 이르니, 그곳에 왜군이 가득하였다. 고구려군이 도착하자 왜적이 퇴각하였다.
살수에 이르러 수 나라 군대가 살수를 반쯤 건너자, 을지문덕이 군사를 내보내 뒤에서 적군을 공격하니 우둔위장군 신세웅이 전사하였다. (중략) (수나라 군이) 처음 요하에 이르렀을 때에는 무릇 30만 5천 명이었는데, 요동성으로 돌아간 것은 단지 2천 7백 명이었다.
@삼국사기
(영류왕) 14년 당이 광주사마 장손사를 보내 수 병사의 유해가 묻힌 곳에 와서 제사를 지내게 하고, (고구려가) 세운 경관(적의 유해를 묻는 곳에 세운 승전 기념물)을 허물어 버렸다. 봄 2월에 왕이 많은 사람들을 동원하여 동북의 부여성에서부터 동남의 바다에 이르기까지 처여 리에 걸쳐 장성을 축조하기 시작하였다.
@삼국사기
여러 장수가 급히 안시성을 공격하였다. (중략) 밤낮으로 쉬지 않고 무릇 60일 50만 명을 동원하여 토산을 쌓았다. (중략) 아군 수백 명이 성이 무너진 곳으로 나가 싸워서 마침내 토산을 빼앗아 차지하고 주위를 깎아 이를 지켰다. (중략) (황제가) 군사를 돌리도록 명하였다.
@삼국사기
p.37
6세기 말 ~ 7세기에 중국의 통일 왕조인 수와 당이 팽창 정책을 펴면서 동아시아 정세는 크게 변화하였고, 중국과 맞닿아 있었던 고구려는 중국과의 충돌을 피할 수 없었어요. 스와의 전쟁 과정에서 고구려의 장수 을지문덕이 살수에서 수의 대군을 격파하였습니다.(살수 대첩). 수의 뒤를 이어 당이 들어서자, 고구려는 당의 침일에 대비해 부여성에서 비사성에 이르는 천리장성을 축조하였어요, 정변을 일으켜 권력을 잡은 연개소문은 당에 강경하게 대응하였고, 당 태종은 연개소문의 정변을 구실 삼아 직접 대규모 병력을 이끌고 침략하였어요. 고구려는 안시성에서 당의 대군을 물리쳤습니다.(안시성 싸움).
p.37
i인물
연개소문
연개소문은 천리장성을 쌓을 때 최고 감독자였어요. 그의 세력이 커지자 영류왕과 대신들은 연개소문을 제거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이를 눈치챈 연개소문은 영류왕을 죽이고 보장왕을 왕위에 올린 뒤 스스로 대막리지가 되어 권력을 장악하였어요(642).연개소문은 당에 대해 강경한 입장을 취하였습니다.
p.37
iWord
욕살, 치려근지
고구려 후기에 성을 단위로 지역을 나누고 성의 규모에 따라 욕살, 치려근지 등의 지방관을 파견하였어요
고구려 수림성 사람인 대형 모잠이 남은 백성을 모아 궁모성으롲부터 패강 남쪽에 이르러 당나라 관리와승려 법안 등을 죽이고 신라로 향하였다. (중량) 안승을 보고 한성(황해도 재령) 안으로 맞아들여 받을어 임금으로 삼았다.
@삼국사기
p.38
고구려가 나-당 연합군의 침입으로 멸망한 후에 검모잠이 왕족인 안승을 왕으로 추대하여 한성9황해도 재령에서 다시 고구려를 세우고자 부흥 운동을 전개하였어요. 고연무도 오골성을 중심으로 부흥 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그러나 안승이 검모잠을 죽이는 등 지도층 내부에서 분열이 일어나 고구려 부흥 운동은 실패하였습니다. 안승은 무리를 이끌고 신ㄹ로 망명하였고, 신라는 안승 집단을 금마저(익산)에 머물도록 하고 안승을 보덕국 왕으로 봉하였어요(674).
경주 호우총에서 발견된 그릇으로, 그릇 밑바닥에 '을묘년국강상 광개토지호태왕 호우십'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어 당시 신라와 고구려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것을 짐작하게 해 줍니다.
광개토 태왕릉비와 충주 고구려비
4세기 말 ~ 5세기에 고구려가 넓은 영토를 차지하는 등 전성기를 아ㅣ루었음을 알려 주는 비석들이에요, 광개토 태왕릉비는 장수왕이 아버지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것으로, 광개토 태왕이 백제 및 신라와 가야 지역까지 진출하였다는 내용이 새겨져 있어요. 충주 고구려비는 국내에 남아 있는 유일한 고구려의 비석으로, 고구려가 한강 이남까지 진출한 사실을 보여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