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순식은 강원도 명주 사람이다. 그는 그 고을의 장군으로 오랫동안 굴복하지 않아 태조가 걱정하였다. 사랑 벼슬을 하는 권열이 "아버지가 아들에게 명령하고 형이 아우에게 가르침을 주는 것이 당연한 세상 이치입니다. 순식의 아버지 허월이 지금 중이 되어 내원에 있으니 그를 파견하여 회유하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건의하였다. 순식이 큰아들 수원을 보내 항복하자 태조는 그에게 왕씨 성을 주고 땅과 집을 주었다.
@고려사
p.108
태조는 지방 세력을 포섭하기 위해 호족과 정략 결혼을 하거나 호족에게 관직과 토지, 성씨를 내려 주고, 그를의 지역 지배권을 부분적으로 인정해 주었어요.
발해는 우리 국경과 인접하여 있었는데 거란과는 원수지간이었다. 거란이 군사를 일으켜 발해를 공격하여 멸망시키고 동단국이라 고쳐 부르니, 발해국의 세자 대광현 등이 나머지 무리를 이끌고 오니 앞뒤로 도망쳐 온 자가 수만 호였다. 왕은 이들을 후하게 대접하고 대광현에게 왕계라는 성명을 내려주었다. 또한, 종실의 적에 붙여그 선대의 제사를 받들게 하였다.
@고려사절요
p.108
후고구려를 세운 궁예가 스스로 미륵이라 칭하며 실정을 이어가자 신하들이 궁예를 몰아내고 왕건을 왕으로 추대하였습니다. 태조 왕건은 국호를 '고려'로 정하고 송악으로 천도하였어요. 한편, 후백제를 세운 견훤은 신라의 수도 금성을 습격해 경애왕을 죽이고, 새 왕(경순왕) 세웠어요. 이 소식을 들은 태조가 공산(대구) 전투에서 후백제군에 맞서 싸웠으나 충신 신숭겸이 죽고, 고려군은 크게 패하였습니다. 그 뒤 태조는 고창(안동) 전투에서 후백제 군에 승리하여 후삼국 통일의 주도권을 장악하였어요. 이러한 상황에서 견훤이 넷째 아들 금강에게 왕위를 물려주려고 하자 불만을 품은 큰아들 신검이 난을 일으켜 견훤을 금산사에 유패하였고, 견훤은 탈출할여 태조에게 귀순하였습니다. 그리고 나라를 더 이상 유지하기 어려워진 경순왕이 고려에 항복해 오자 태조는 그를 받아들이고 신라를 통합하였어요. 이후 태조는 견훤과 함께 일리천 전투에서 신검의 후백제군을 격퇴하고 후삼국을 통일하였어요. 한편, 발해가 멸망하고 왕자 대광현이 고구려계를 포함해 많은 유민을 이끌고 고려에 망명해 오자, 태조는 이들을 우대하여 받아들였습니다. 이로써 고려는 후삼국을 비롯해 발해 유민까지 포함한 민족의 재통일을 완성하였습니다. 이후 태조는 서경을 전진 기지로 삼고 북진 정책을 추진하여 청천강에서 영흥까지 영토를 확장하였어요.
왕규의 난
태조 왕건이 죽고 혜종이 즉위하자 권력 다툼이 일어났어요. 혜종이 즉위 2년 만에 죽자 혜종 때부터 권력을 노리던 왕규가 자신의 손자를 왕으로 세우기 위해 난을 일으켰습니다. 왕규는 자신의 두 딸을 왕건과 결혼시킨 외척이었어요. 혜종의 동생으로 뒤를 이은 정종은 서경을 기반으로 세력을 키운 왕식렴의 도움을 받아 왕규의 반란을 진압하였으나, 재위 4년 만에 병사하였어요. 정종의 뒤를 이어 친동생인 광종(왕소)이 즉위하였습니다.
광종 7년(956)에 노비를 조사해서 옳고 그름을 분명히 밝히도록 하였다. 이 때문에 주인을 배반하는 노비들이 억누를 수 없을 정도로 많아지고, 주인을 업신여기는 풍속이 유행하였다. 사람들이 다 수치스럽게 여기고 원망하였다. 왕비도 간절히 말렸지만 받아들이지 않았다.
@고려사절요
p.109
<노비안검법>
노비안검법은 억울하게 노비가 된 사람을 조사하여 다시 양인으로 되돌려 준 법이에요. 노비는 호족의 경제, 군사적 기반이었기 때문에 노비안검법의 시행으로 호족 세력이 약화되었어요. 또한 조세를 부담하는 양인의 수가 증가하여 국가 재정이 확충되었습니다.
p.109
삼국 이전에는 과거법이 없었다. 고려 태조가 처음으로 학교를 세웠으나 과거로 인재를 뽑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하였다. 광종이 쌍기의 의견ㅇㄹ 받아들여 과거로 인재를 뽑게 하였다. 이때부터 문풍이 일어났고, 그 법은 대체로 당나라 제도를 따른 것이다.
@고려사
p.109
<과거제>
과거제는 후주에서 귀화한 쌍기의 건의로 실시된 관리 선발 제도예요. 유교 경전과 문장 능력을 시험하여 관리를 선발하였어요. 과거제의 실시로 유교적 소양을 갖춘 신진 세력을 선발하여 왕권을 뒷받침하는 세력으로 키울 수 있었습니다.
p.109
신라 태종 무열왕이 당의 복장 제도를 도입하려고 한 뒤부터 관복 제도가 중국과 비슷하게 되었다.,, 고려 태조가 나라를 세울 때는 새로 시작하는 것이 많아서 관복 제도도 우선 신라의 제도를 따랐다. 광종 떄에 와서 비로소 백관의 공복을 정하였으니 이때부터 귀천과 상하의 차별이 명확해졌다.
@고려사
p.109
<관리의 공복 제정>
광종은 관리들이 입는 제복을 4가지 색(자, 단, 비, 녹)으로 구분하는 공복을 제정하였어요. 관등에 따라 다른 색깔의 공복을 착용하도록 해 관직 체제를 정비하고 위계질서를 확립하였습니다.
제7조 국왕이 백성을 다스림은 집집마다 가서 돌보고 날마다 이를 보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 ㄴ까닭으로 수령을 보내어 가서 백성의 이익되는 일과 손해되는 일을 살피게 하는 것입니다. 외관을 두십시오.
제9조 관료들로 하여금 조회할 때에는 모두 중국 및 신라의 제도에 의하여 공복을 입도록 하여 지위의 높고 낮음을 분별하도록 하소서.
제10조 승려들이 지방에 왕래하면서 여관과 역에 머물고 지방의 아전과 백성을 매질하여 대접의 소홀함을 꾸짖습니다. 아전과 백성들은 승려들이 왕명을 받들고 나왔는지 의심하여 감히 말하지 못하니, 폐단이 이보다 큰 것은 없습니다. 지금부터 승려들이 여관과 역에 숙박하는 것을 금지시켜 그 폐단을 제거하십시오.
제 13조 우리나라에서는 봄에는 연등회를, 겨울에는 팔관회를 열어 많은 사람들이 동원되어 힘든 일을 하고 있으니, 이를 줄여서 백성이 힘을 펴게 하십시오.
제19조 삼한 공신의 자손을 등급에 따라 관계와 관직을 주어 업신여김을 받고 원망하는 일이 없도록 하소서.
제20조 불교는 자신을 다스리는 근본이며, 유교는 나라를 다스리는 근원입니다. 자신을 다스리는 것은 내생을 위한 것이고,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오늘의 급한 일입니다. 오늘은 아주 가까운 것이고, 내생은 지극히 먼 것이니, 가까운 것을 버리고 먼 것을 구하는 것은 그릇된 일이 아니겠습니까?
@고려사절요
p.109
성종은 즉위 후 5품 이상의 고위 관리들에게 정책을 건의하도록 하였어요. 그중 최승로가 올린 시무 28조를 채택하여 유교 이념을 바탕으로 통치 체제를 정비하였습니다. 최승로는 시무 28조의 제7조에서 지방관 파견을 통한 중앙 집권, 제 13조에서 불교 행사 축소를 통한 민생 안정, 제20조에서 불교의 폐단을 비판하며 유교 정치 이념을 확립할 것을 주장하였습니다.
지방관이 파견된 주군, 주현보다 지방관이 파견되지 않은 속군, 속현(향리가 행정 담당)이 더 많음
특수 행정 구역인 향, 부곡, 소 존재
속군, 속현과 향, 부곡, 소는 주군, 주현을 통해 간접 지배를 받음
지방관이 파견되면서 호족은 향리로 전환되어 행정 실무 담당
iWord
향, 부곡, 소
특수 행정 구역으로, 향과 부곡은 주로 농사를 짓는 지역이고, 소는 국가에서 필요로 하는 수공업품, 광산물을 생산하는 지역이에요.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법적으로는 양인이지만 거주 이전의 자우가 없고 일반 군현민에 비해 더 많은 세금을 내는 등 차별을 받았어요.
고려의 지방 생정 조직은 몇 차례 변화를 거쳐 5도 양계와 경기 지역으로 정비 되었어요. 5도는 일반 행정 구역이고, 국경선을 마주한 북계와 동계의 양계는 군사 행정 구역이며, 경기도 수도 개경과 그 주변입니다. 5도 아래에는 군현과 특수 행정 구역인 향, 부곡, 소 등이 있었어요. 군현은 지방관이 파견되는 주현과 파견되지 않은 속현으로 구분되었는데, 초기에는 속현의 수가 훨씬 많았으나 후대로 가면서 점차 감소하였습니다. 양계 아래에는 구방상 요충지를 중심으로진이 설치되었어요. 5도에는 안찰사, 앙계에는 병마사가 파견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