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전은 총재(재상)가 관장하는 것이다. 사도 이하가 총재의 소속이니, 교전 이하 역시 총재의 직책이다. 총재에 훌륭한 사람을 얻으면 6전이 잘 거행되고 모든 직책이 잘 수행된다. 그러므로 "임금의 직책은 한 사람의 재상을 논의하는 데 있다."라고 하였으니, 바로 총재를 두고 한 말이다.
p.180
급진 개혁파 신진 사대뷘 정도전은 이성계를 도와 조선 건국을 주도하였어요. 그는 과전법 실시, 한양 도성 건설, 제도 정비 등을 통해 건국 초기 국정 운영의 기틀을 마련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어요. 불교의 폐단을 비판하기 위해 "불씨잡변"도 저술하였습니다. 또한, 정도전은 민본주의와 재상 중심의 정치를 주장하였는데, 그가 편찬한 법전임 "조선경국전"과 정치 철학을 담은 "경제문감"에는 이러한 주장이 잘 드러나 있어요. 하지만 제1차 왕자의 난 때 재상인 그의 권력 확대를 견제하던 이방원에 의해 죽임을 당하였어요.
<하여가>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하여 백 년까지 누리리라
<단심가>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p.180
정몽주는 고려 말의 성리학자로, 온건 개혁파 신진 사대부를 대표하는 인물이에요. 정몽주는 위화도 회군 이후 이성계와 급진 개혁파 신진 사대부가 주도하는 조선 건국에 반대하였습니다. 결구구 이방원 세력에 의해 살해도이었는데, 개성에 있는 선죽교에서 죽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이방원이 정몽주를 제거하기 전 그의 뜻을 묻기 위해 지은 시 '하여가'와 그에 대한 정몽주의 답시 '단심가'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왕자의 난
조선 초기 왕위 계승권을 둘러싸고 태조의 왕자들 사이에서 벌어진 두 차례의 난이에요. 제 1차 왕자의 난은 태조와 정도전 등이 여덟째 아들 방석을 세자로 책봉하고 사병을 혁파하려고 하자, 다섯째 아들 방원이 사병을 동원해 정도전 등 반대파를 죽이고 권력을 장악한 사건입니다. 이후 태조의 둘째 아들 방과(영안군)가 세자에 책봉되었고, 1개월 뒤 태조의 양위를 받아 제2대 정종이 되었어요. 정종 때 태조의 넷째 아들 방간은 방원의 정권 장악에 불만을 품고 난을 일으켰는데, 방원이 이를 진압하였습니다.(제2차 왕자의 난). 제2차 왕자의 난 이후 방원이 정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어요(제3대 태종).
의정부의 서사를 나누어 6조에 귀속시켰다. (중략) 처음에 왕(태종)은 의정부의 권한이 막중함을 염려하여 이를 혁파할 생각이 있었지만, 신중하게 여겨 서두르지 않았는데 이때에 이르러 단행하였다. 의정부가 관장한 것은 사대문서와 중죄수의 심의뿐이었다.
@태종실록
상왕(단종)게서 나이가 어리시어 모든 조치를 다 대신에게 위임하여 의논해서 시행하였던 것인데, 이제 내가 명을 받아 왕통을 계승하여 군국의 서무를 모두 친히 보고받고 결단하여 다 조종의 옛 제도를 회복하였으니, 이제부터 형조의 사형수를 제외한 모든 서무는 6조에서 각기 그 직무에 따라 직계하라.
@세조실록
p.181
6조으 ㅣ판서가 의정보를 거치지 않고 업무를 왕에게 직접 보고하고 왕의 결재를 받아 정책을 시행하는 제도예요. 왕권 강화를 목적으로 태종과 세조 때에 실시되었어요.
6조 직계제를 시행한 이후 일의 크고 작음이나 가볍고 무거움이 없이 모두 6조에 붙여져 의정부와 관련을 맺지 않고, 의정부의 관여 사항은 오직 사형수를 논결하는 일 뿐이었다. 그러므로 옛날에 재상에게 위임하던 뜻과 어긋남이 있고 (생략) 6조는 각기 모든 직무를 먼저 의정부에 품의하고, 의정부는 가부를 헤아린 뒤에 왕에게 아뢰어 (왕의) 전지를 받아 6조에 내려 보내어 시행한다.
@세종실록
p.181
의정부에서 6조의 업무를 심의한 후 왕에게 보고를 올리면 왕의 최종적인 재가를 통해 정책을 시행하는 제도예요.
간관이 상소하기를 "군주의 학문은 한갓 외우고 설명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날마다 선비를 맞이하여 간론을 듣는 까닭은 첫째, 어진 사대부를 만나는 시간을 늘려 그 덕성을 배우려는 것이고, 둘째, 환관 및 궁첩과 친하게 지내는 시간을 줄여 게으름에서 떨쳐 일어나려는 것입니다. (생략) 삼가 원하옵건대, 전하께서는 날마다 경연을 여시어 "대학"을 가져와 강론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이를 윤허하였다.
@태조실록
p.181
임금과 신하가 모여 유교 경전과 역사에 대해 연구하며 학문과 정책을 토론하던 자리예요. 경연은 고려 예종 때 처음 시작되었으나 활발하지 못하였고, 조선 시대에 들어와 발전하였어요. 성종 때부터 홍문관에서 경연을 담당하였고, 세조와 연산군 때 일시적으로 경연이 폐지되었으나 부활하여 고종 때까지 존속하였어요.
계유정난으로 정권 장악 <- 무신 이징옥 반란 -> 단종에게 양위를 강요하여 즉위, 단종 복위 운동 진압(성삼문 등 처형, 단종은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영월에 유배되었다가 죽임을 당함)
왕권 강화
6조 직계제 부활
집현전과 경연 폐지
함길도 토착 세력이 일으킨 이시애의 난 진압
유향소 폐지
"경국대전" 편찬 시작
직전법 실시(현직 관리에게만 토지의 수조권 지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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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유정난
문종이 일찍 죽고 어린 단종이 즉위하자, 수양 대군이 난을 일으켜 단종을 보좌하던 김종서, 황보인 등을 제거하고, 안평 대군을 축출한 후 권력을 장악하였어요. 이 정변이 계유년에 일어나 계유정나이라고 합니다. 계유정난으로 정권을 장악한 수양 대군은 단종의 양위를 받아 왕위에 올랐어요(제7대 세조).
p.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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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국대전
다스릴 경, 나라 국, 큰 대, 법 전. 즉, '나라를 다스리는 방법을 담은 큰 법전'이라는 뜻으로, 조선 시대 통치의 기준이 되었어요. 이, 호, 예, 병, 형, 공전의 6전 체제로 구성된 "경국대전"은 세조 때 편찬이 시작되어 성종 때 완성, 반포되었어요.
p.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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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향소
지방 양반이 중심이 된 향촌 자치 기구로, 지방 수령을 보좌하고 향리의 부정을 단속하며, 향존의 풍속을 바로 잡는 데 힘썼어요.
김종직은 경상도 사람이다. 학문이 뛰어나고 문장을 잘 지으며 가르치기를 즐겼다. 그에게 배워 과거에 급제한 사람이 많았다. 경사도 선비로 조정에 벼슬하는 사람들이 그를 우두머리로 모셨다. 스승은 자기 제자를 칭찬하고 제자는 자기 스승을 칭찬하는 것이 정도에 지나쳤다. 조정에 새로이 진출한 무리는 그른 것을 알이 지 못하고 함께 어울리는 자가 많았다. 그때 사람들이 이를 비판하여 '경상도 무리'라고 하였다.
p.182
15세기에는 세조 즉위에 공을 세웠던 훈구 세력이 정치적 실권을 장악하였어요. 이에 성종은 김종직 등 사람을 등용하여 훈구 세력을 견제하고자 하였어요. 사림은 주로 3사의 언관직에 등용되어 학술과 언론을 담당하며 훈구 세력의 부정과 비리를 비판하였어요. 훈구와 사림은 한동안 세력 균형을 이루었으나 점차 두 세력의 대립이 심해졌어요.
조의제문: 정축년 10월 어느 날 나는 밀성에서 경산으로 가다가 답계역에서 자는데, 꿈에 신인이 헌걸찬 모습으로 나타나 말하길 "나는 초나라 회왕의 손자 심(의제)인데, 서초 패왕(항우)에게 살해되어 빈강에 던져졌다." 하고는 갑자기 사라졌다. 꿈에서 깨어나 놀라 생각하기를 (중략) '역사를 상고해 보아도 강에 던져졌다는 말은 없는데, 정녕 항우가 사람을 시켜서 심을 몰래 죽이고 그 시체를 물에 던진 것인가? 이는 알 수 없는 일이다.' 하고 마침내 글을 지어 조문하였다.
@연산군일기
유자광이 하루는 소매 속에서 책자 한 권을 내놓으니, 바로 김종직의 문집이었다. 그 문집 가운데서 조의제문을 지적하여 여러 추관(죄인을 심문하는 관리)에게 두루 보이며 말하기를, "이것은 다 세조를 지목한 것이다. 김일손의 죄악은 모두 김종직이 가르쳐서 이루어진 것이다."라고 하고, (중략) 왕에게 아뢰었다.
@연산군일기
<갑자사화>
왕이 어머니 윤씨가 폐위되고 죽은 것이 엄씨와 정씨의 참소 때문이라 여기고, 밤에 엄씨와 정씨를 대궐 뜰에 결박하여 놓고 손수 마구 치고 짓밟았다. (중략) 왕이 장검을 들고 자순 왕대비 침전 밖에 서서 (중략) 말하기를 "대비는 어찌하여 내 어머니를 죽였습니까?"라고 하며 불손한 말을 많이 하였다.
@연산군일기
<기묘사화 - 위훈 삭제>
대사현 조광조 등이 아뢰기를, "(중략) 반정 때에 공이 있었다면 기록되어야 하겠으나, 이들은 또 그다지 공도 없습니다. 무릇 이들을 공신으로 중히 여기면 공과 이를 탐내게 되니 임금을 죽이고 나라를 빼앗는 일이 다 이것에서 비롯됩니다. 임금이 나라를 잘 다스리고자 한다면 먼저 이의 근원을 막아야 합니다. (중략)"라고 하였다.
@중종실록
<을사사화>
이덕웅이자백하기를, "평소 대윤, 소윤에 휘말리지 않으려고 조심하였는데, 그들과 함께 모반을 꾸민다는 것은 말도 안됩니다."라고 하였다. 계속 추궁하자 그는 "윤임이 제게 이르되 경원 대군이 왕위에 올라 윤원로가 권력을 잡게 되면 자신의 집안은 멸족될 것이니 봉성군을 옹립하자고 하였습니다."라고 실토하였다.
@명종실록
김효원이 과거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이조) 전랑의 물망에 올랐으나, 심의겸은 그가 윤원형의 문객이었다 하여 반대하였다. 그 후에 심충겸(심의겸의 동생)이 장원 급제하여 전랑으로 천거되었으나, 외척이라 하여 김효원이 반대하였다. 이에 양편 친지들이 각기다른 주장을 내세우며 서로 배척하여 동인, 서인이라는 말이 여기에서 비롯하였다. 효원의 집은 동쪽 건천동에 있고, 의겸의 집은 서쪽 정릉동에 있었기 때문이다. 동인의 생각은 결코 외척을 등용할 수 없다는 것이었고, 서인의 생각은 의겸이 공로가 많을 뿐더러 선비인데 어찌 앞길을 막느냐는 것이었다.
@연려실기술
p.182
선조 때 중앙 정치를 주도하게 된 사람은 명종 때 나타난 척신 정치의 잔재 청산 문제로 갈등을 겪었어요. 기성 사람은 척신 정치의 잔대 청산에 소극적이었던 반면, 신진 사람은 척신 정치의 잔대 청산을 적극적으로 주장하였습니다. 이러한 갈등은 이조 전랑의 임명 문제를 둘러싸고 더욱 심해져서 신진 사람을 중신으로 한 동인과 기성 사람을 중심으로 한 서인으로 붕당이 형성되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