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한 요동 태수 최식이 말하기를 "지금 요동에서는 쟁기로 농사를 짓는데 (중략) 두 마리 소를 사용하는데 두 사람이 끌고 한 사람이 쟁기를 잡고 간다. 그 뒤에 한 사람이 씨를 뿌리고 한 사람이 덮는다. 대게 소 두마리와 여섯 사람이 함께 일한다."라고 하였다.
"제민 요술"
나라에 큰 창고는 없고 집집마다 조그만 창고가 있는데, 이를 부경이라고 한다.
<백제>
구수왕 9년(222) 봄 2월에 담당 관청에 명하여 재방을 수축하게 하였다.
@삼국사기
<신라>
파사 이사금 즉위 11년(90) 가을 7월에 사신 열 사람을 파견하여, 주주나 군주로서 공무에 근실하지 못하여 농토를 많이 묵히는 자를 몰래 살펴 벼슬을 낮추거나 거두었다.
@삼국사기
지증 마립간 3년(502) 3월에 주주와 군주에게 각각 명하여 농사를 권장하게 하였고, 처음으로 소를 부려 논밭을 갈았다.
@삼국사기
p.72
삼국 시대에는 농업이 경제 활동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였어요. 이에 삼국은 농민의 생활을 안정시키고 농업 생산력을 높이기 위해 정체 농기구를 보급하고 우경을 장려하였어요. 또한, 황무지를 개척하고 보와 저수지 등의 수리 시설을 확충하여 가뭄에 대비하였습니다. 농업에 힘쓰지 않는 지방관은 처벌하기도 하였어요.
p.72
#삼국 시대 귀족과 농민의 생활 역사서 | 귀족의 기회집(황해도 안약 1호분 벽화), 귀족과 노비의 모습(중국 지린성 지안, 무용총 벽화)
대가들은 경작하지 않고 먹는 자가 1만 명이나 도미ㅕ, 하호(평민)는 먼 곳에서 쌀, 낟알, 물고기, 소금 등을 져서 날라다 대가에게 공급하였다.
@삼국지
위략에 이르기를 대가들은 경작하지 않고, 하호들은 세금을 바치며 노비와 같다.
@대평어람
p.72
삼국 시대의 귀족은 본래 자신이 갖고 있던 재산 외에 국가로부터 녹읍과 식읍을 지급받았으며, 고리대 등을 통해 많은 사유지와 노비를 소유하여 경제적로 풍족한 생활을 하였어요. 반면에 농민은 자신이 소유한 땅이나 귀족의 토지를 빌려 경작하였는데. 국가와 귀족에게 좃로 곡물과 특산물을 바쳐야 학였기 때문에 대체로 어려운 생활을 하였어요.
삼국의 대외 무역은 4세기 이후 크게 발달하였어요. 교역은 왕실과 귀족의 필요에 따라 주로 공무역의 형태로 이루어졌습니다. 고구려는 남북조 및 유목 민족과 교류하였고, 백제는 남조 및 왜와 활발하게 교류하였습니다.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를 통해 중국과 교류하다가 당항성을 확보한 이후에는 직접 교류하였습니다.
신문왕9년(689) 1월, 내외관의 녹읍을 혁파하고 매년 조를 내리되 차등이 있게 하여 이로써 영원한 법식을 삼았다.
성덕왕 21년(722) 8월, 처음으로 백성에게 정전을 지급하였다.
경덕왕 16년(757) 3월, 여러 내외관의 월봉을 없애고 다시 녹읍을 나누어 주었다.
소성왕 원년(799) 청주의 거로현을 학생의 녹읍으로 삼았다.
@삼국사기
p.72
통일 이후 신라는 귀족들에게 지급하는 식읍을 제한하고, 관리에게 관료전을 지급하면서 녹읍을 폐지하였어요. 이에 농민에 대한 귀족의 지배력이 크게 약화되고 왕권이 강해졌으나, 경덕왕 때 귀족들의 반발로 녹읍이 부활되었어요. 한편, 성덕왕은 백성에게 정전을 지급하여 국가의 토지 지배력을 강화하였습니다.
p.72
iWord
정전
선덕왕 때 백성에게 지급한 토지예요. 자기 소유의 땅을 농사짓는 자영농이 많을수록 국가가 거둘 수 있는 세금이 늘어납니다. 또한, 농민이 겨제적으러ㅗ 어려우면 귀족에게 귀속될 가능성이 높아지고, 이것은 왕권 약화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에 자영농을 육성하는 것이 국가로서는 중요한 사업이었어요.
p.72
iWord
동시
지증왕 때 수도 금성에 설치된 시장이에요. 동시를 관리, 감독하기 위해 동시전이라는 관청이 설치되었어요. 통일 후 인구가 늘고 상품 수요가 증가하여 금성에 서시, 남시와 같은 시장이 추가로 설치되었고, 시전(서시전, 남시전)을 두어 각 시를 감독하였어요.
일본 도다이시(동대사) 쇼소인(정창원)에서 말견된 통일 신라 시대의 문서로, 서원경(청주) 인근 4개 촌락의 토지 크기, 인구수, 소와 말의 수 등이 기록되어 있어요. 호는 인구수에 따라 9등급, 인구는 남녀를 각기 연령별로 6등급으로 분류하여 기재하였어요. 신라 촌락 문서는 3년 마다 다시 조사하여 기록하였는데, 이를 통해 촌락의 경제 상황과 세무 행정에 대해 알 수 있어요.
통일 이후 신라와 당의 교류가 증가하면서 산동반도와 양쯔강 하류에 신라방, 신라촌, 신라소, 신라원 등이 설치되었어요. 신라는 장보고의 청해진 설치로 안정적인 해상 무역이 가능하였습니다.
발해는 대외 무역에 적극적이었으며 거란, 당, 일본, 신라 등과 교류히였어요. 당과는 문왕 때 교류를 시작하였으며, 당의 산둥반도에 발해관이 설치 되었어요. 일본과도 일본도를 통해 무역을 활발히 전개하였도, 신라와는 신라도를 통해 교류하였습니다. 발해는 솔빈부의 말, 막힐부의 돼지 등이 특산물로 유명하였어요.
귀하를 뵌 적은 없으나 높으신 이름을 오래 전에 들었기에 흠모하는 마음이 더욱 깊어만 갑니다. (중략) 부족한 이 사람은 다행히도 대사께서 세우신 이곳 법화원에 머무를 수 있었던 것을 말로 다할 수 없이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저는 은혜를 입고 있으면서도 멀리 떨어져 찾아 뵙지 못하였습니다.
@입당구법순례행기
p.73
일본의 승려 엔닌은 당을 순례하던 중 위험에 처했을 때 장보고가 세운 법화원에 머무르며 장보고의 동무을 받았어요. 엔닌이 당을 순례하고 기록한 여행기인 "입당구법순례행기"에는 엔니이 장보고에게 보낸 편지가 실려 있습니다. 장보고는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하여 신라, 당, 일본을 잇는 해상 무역ㅇㄹ 장악하였어요. 그리고 중국 산둥반도에 법화원이라는 사찰을 지었는데, 이곳에는 신라인뿐만 아니라 중국인, 일본인 등 많은 사람이 왕래하였어요. 한편, 장보고는 중앙의 권력 다툼에 연루되어 반란을 일으켰다가 살해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