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조의 군사들이 궁문으로 마구 들어오자, 목종이 모면할 수 없음을 깨닫고 태후와 함께 목 놓아 울며 법왕사로 옮겼다. 잠시 후 황보유의 등이 대량언군 [순]을 받을어 왕위에 올렸다. 강조가 목종을 폐위하여 양국공으로 삼고 , 군사를 보내 김치양 부자와 유행간 등 7명을 죽였다. (중략) 적성현에 이르자 강조가 사람을 시켜 목종을 죽인 후 자결하였다고 보고하였으며, 그 시신은 문짝으로 만든 관에 넣어 객관에 임시로 안치하였다.
@고려사
p.132
변방을 지키던 고려의 장수 강조가 정변을 일으켜 당시 권력을 장악하고 있었던 목종의 어머니 천추 태후와 김치양 일파를 제거한 후 목종을 폐위하고 현종을 즉위시킨 사건을 말해요. 거란은 강조를 문책한다는 구실로 고려를 침략하였습니다.
거란의 1차 침입: 거란 장수 소손녕이 서희에게 말하길 "너희는 신라 땅에서 일어났는데 고구려의 땅을 가지고 있다., (중략) 또한, 국경은 우리와 맞대고 있으면서 바다 건너 송을 섬기고 있다. 지금 땅을 바치고 조공을 보낸다면 아무 일이 없을 것이다." 이에 서희가 "고려는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이기에 국호를 고려라고 하고 평양에 도읍을 정한 것이다. (중략) 거란과는 교루하고 싶어도 여진이 가로막고 있어 어렵다. 만약 여진을 쫓아내고 우리의 옛 땅을 되돌려주어 성과 보를 쌓고 길이 통하게 하여 준다면 어찌 조공을 바치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
@고려사절요
거란의 2차 침입: 양규가 홍화진으로부터 군사 7백여 명을 이끌고 통주까지 와서 군사 1천여 명을 수습하였다. 밤중에 곽주로 들어가서 지키고 있던 거란군을 급습하여 모조리 죽인 후 성 안에 있던 남녀 7천여 명을 통주로옮겼다.
@고려사
거란의 3차 침입: 거란의 병사가 귀주를 지나자 강감찬 등이 동교에서 맞아 싸웠다. (중략) 아군이 추격하여 석천을 건너 반령에 이르니 시신이들을 덮고 사로잡은 사람과 노획한 말, 낙타, 갑옷, 무기는 모두 헤어릴 수 없었다. 살아서 돌아간 자가 (십만여 명 중에서) 겨우 수천 명이니 거란이 패한 것이 이보다 심한 적이 없었다.
@고려사
강감찬이 수도에 성곽이 없다 하여 나성을 쌓을 것을 요청하니, 왕이 그 건의에 따라 왕가도에게 명령하여 축조하게 되었다.
@고려사
p.132
고려는 정종 때 거란의 침입에 대비하여 광군을 창설하였습니다. 이후 성종 떄 거란이 고려를 침략하였고(거란의 1차 침입, 993), 이때 서희가 거란 장수 소손녕과 외교 담판을 벌여 송과 관계를 끊고 거란과 교루하기로 약속하고 강동 6주를 확보하였어요. 그러나 고려가 송과의 관계를 계속 유지하자, 거란은 강조의 정변을 구실로 다시 침략하였습니다(거란의 2차 침입, 1010). 거란의 공격으로 개경이 함락되고 현종이 나주까지 피란을 가는 등 위기를 맞았으나 양규의 활약으로 많은 고려인 포로를 구하기도 하였어요. 거란의 3차 침입(1018) 때는 강감찬이 이끄는 고려군이 거란의 군대를 귀주에서 크게 무찔렀어요(귀주 대첩, 1019). 고려는 이민족의 침입에 대비하여 개경 주위에 나성을 쌓고, 국경 지대에는 압록강에서 동해안의 도련포에 이르는 천리장성을 쌓았어요.
p.132
iWord
만부교 사건
고려는 건국 초기부터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과 사이가 좋지 않았어요. 태조 때 거란이 고려에 사신을 보내면서 낙타를 선물하였는데, 태조는 사신을 귀양 보내고 낙타를 만부교 아래 묶어 두어 굶어 죽게 하였어요. 이로써 고려와 거란의 외교 관계는 단절되었습니다.
왕이 여진을 정벌하려고 오연총을 윤관의 부관으로 삼았다. 그때 대신들이 모두 찬성ㄹ하였으나 오연총은 자못 의심스럽게 여겨 작은 소리로 윤관에게 말하니 윤관이 말하기를, "계책은 이미 결정되었는데 또 무엇을 의심하겠는가?"라고 하였다. 드디어 군대를 이끌고 나가서 여진을 격파하여 영를 개척하고 9성을 쌓았다.
@고려사
왕이 요불과 사현 등 6인을 접견하고 입조한 연유를 묻자 요불 등이 아뢰기를, "(중략) 만약 9성을 되돌려 주어 우리의 생업을 편안하게 해 주시면, 우리는 하늘에 맹세하여 자손 대대에 이르기까지 공물을 정성껏 바칠 것이며 감히 기와 조각 하나라도 국경에 던지지 않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중략) 왕이 9성의 반환을 허락하자, 요불이 감격하여 울며 감사의 절을 올렸다.
@고려사
금년 12월 16일에 이르러 처인부곡에서 몽골군과 큰 싸움이 벌어졌는데, 여기서 그 우두머리 살리타를 사살하고 사로잡은 이도 많았다. 이에 그 남은 무리들이 기세를 잃고 회군하여 갔다.
@동국이상국집
고종 19년(1232), 몽골군이 이르자 충주 부사 우종주와 유홍익은 양반들과 함께 성을 버리고 도망쳤다. 다만, 노비군과 천민들이 힘을 합하여 몽골군을 무리쳤다.
@고려사절요
충주성이 몽골에 포위를 당한 것이 무릇 70여 일이 되었으며, (중략) 김윤후가 병사와 백성들을 독려하며 말하기를, "만약 힘이 다해 싸운다면 귀천을 막론하고 모두 관직과 작위를 제수하겠다."라고 하였다. 그러고는 관노 문서를 불사르고, 소와 말도 나누어 주었다. 이에 모두 죽음을 무릅쓰고 싸워 몽골군을 물리쳤다.
p.133
몽골이 침입하자 당시 최고 집권자 최우는 서둘러 강화를 맺고, 강화도로 도읍을 옮겨 장기 항전에 대비하였어요. 강화도로 옮겨 간 고려 정부는 국가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였고, 본토에 남겨진 백성들은 가족과 나라를 지키기 위해 몽골군에 대항하여 끝까지 싸웠어요. 대표적인 전투로 처인성 전투(경기도 용인)와 충주성 전투가 있어요. 처인성 전투에서 승리한 처인부곡은 몽골의 침입을 막아 낸 공이 인정되어 처인현으로 승격되었어요. 충주성에서는 노비와 백성들이 주축이 되어 충주성을 지켰어요. 이후 5차 침입 때 몽골군이 다시 충주성을 공격하자 김윤후의 지휘 아래 병사들과 백성들이 몽골군을 막아 냈어요.
배중손이 이끄는 삼별초는 몽골과 강화를 맺고 개경으로 돌아가기로 한 고려 정부에 반발하여 봉기하였어요. 이들은 강화도, 진도, 제주도로 근거지를 옮기면서 대몽 항쟁을 이어 갔어요. 삼별초는 항쟁 과정에서 승화후 왕온을 왕으로 추대하고 일본에 구서를 보내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일본측 문서인 '고려첩장불심조조'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이는 삼별초가 세운 정부에서 보낸 외교 문서가 이전에 고려에서 보낸 문서와 성격이 다르자 일본의 실무자가 그 의문점을 정리한 것입니다.
원에서 사신을 보내 부녀자를 요구해 (중략) 이에 결혼도감을 설치하고 촌가의 여자 140명을 잡아다가 민자(원에 항복한 남송인)에게 나누어 주었다. 만자들이 곧 데리고 돌아가니 곡성이 길에 가득하였다.
@고려사절요
p.133
원은 고려에서 강제로 공녀를 데리고 갔는데 일반 백성뿐 아니라 귀족의 딸까지도 데려갔어요. 이로 인해 조혼의 풍습이 생기기도 하였어요. 수령 옹주는 왕족과 결혼한 사람이었는데 남편을 여의고 홀로 자식을 키우다 딸을 원에 공녀로 보내게 되자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병이 나서 죽었다고 해요.
대사도 기철, 태감 권겸, 경양 부원군 노책이 반역을 도모하다 처단되었으며 그들의 친족과 당여(같은 편에 속하는 사람들)는 모두 도망쳤다.
@고려사
왕이 원 연호의 사용을 중지시키면서 교서를 내렸다. "근래에 나라의 풍속이 크게 바뀌어 오직 권세만을 추구하게 되었으니, 기철 일당이 권세를 믿고 나라의 법도를 뒤흔드는 일이 벌어졌다. (중략) 법령을 다듬어 명확히 하고 기강을 정돈함으로써 조종이 세운 법을 회복하여 온 나라 백성들과 함께 새롭게 시작하고자 한다."
공민왕은 원, 명 교체기라는 상황 속에서 원의 세력이 약화된 틈을 이용해 친원 세력을 숙청하고 자주 정책을 폈어요. 몽골풍을 금지하고 격하된 고려의 관제를 복구하였으며, 내정 간섭 기구인 정동행성 이문소를 폐지하고 인사권을 장악하기 위하여 정방을 혁파하였어요. 또한, 유인우, 이자춘 등을 보내 쌍성총관부를 공격하게 하여 철령 이북의 영토를 회복하였습니다.
공민왕이 원의 제도를 따라 변발을 하고 호복(몽골의 옷차림)을 입고 전상(왕이 앉는 자리)에 앉아 있었다. (중략) 이연종이 말하기를 "변발과 호복은 선왕의 제도가 아니오니, 원컨대 전하께서는 본받지 마소서."라고 하니, 왕이 기뻐하면서 즉시 변발을 풀어버리고 그에게 옷과 요를 하사하였다.
@고려사
p.133
고려에서는 원의 영향으로 몽골 풍속이 유행하기 시작하였는데, 대표적으로 뒷머리먼 남겨 길게 땋아 늘어뜨리는 변발이 있었어요. 족두리, 철락과 같은 의복과 만두, 소주 등의 음식도 몽골에서전해진 것입니다. 공민왕은 반원 자주 정책을 추진하면서 몽골풍을 금지하였습니다.
신돈이 왕에게 전민변정도감을 설치할 것을 청원하고 스스로 판사가 되어 전국에 포고문을 붙였다. "근래에 기강이 크게 무너져 사람들의 탐욕스러움이 풍속이 되었다. 종묘, 학교, 창고, 사사(사찰), 녹전(관리의 녹봉에 충당된 민간 토지의 조세), 군수의 토지와 나라 사람들이 대대로 가져온 전민을 권세가들이 거의다 빼앗아 차지하였다. 그들은 앞서 주인에게 돌려주라고 판결한 것도 그대로 가지고 있으며, 양민을 노예로 삼고 있다. (중략) 이제 도감을 두어 이를 가려 정비하고 서울은 15일, 여러 지방은 40일을 기한하여 잘못을 알고 스스로 고치는 자는 죄를 묻지 않을 것이며, 기한이 지나 발각된 자는 조사하여 다스릴 것이다."라고 명령이 나오자 권세가들 다수가 빼앗은 전민을 그 주인에게 돌려주므로 온 나가라 기뻐하였다.
@고려사
p.134
전민변정도감은 고려 후기에 권문세족이 불법적으로 차지한 토지나 농민 문제를 바로잡기 위하여 설치된 임시 개혁 기구로, 여러 차례 설치와 폐지가 반복되었어요. 대표적으로 공민왕이 신돈을 등용하고 전민변정도감을 설치하여 권문세족이 부당하게 빼앗은 토지를 원래 주인에게 되돌려 주고, 억울하게 노비가 된 사람들을 양인으로 회복시켜 주어 국가 재정을 확충하려 하였어요.
첫째,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거스르는 일은 옳지 않으며
둘째, 여름철에 군사를 동원하는 것은 부적당하고,
셋째, 요동을 공격하는 틈을 타서 남쪽에서 왜구가 침범할 우려가 있으며,
넷째, 무덥고 비가 많이 오는 시기라 활의 아교가 녹아 무기로 쓸 수 없고, 병사들도 전염병에 걸릴 염려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