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자겸은 스스로 국공이 되어 태자와 대등한 대우를 받았다. 자신의 생일을 왕의 생일처럼 인수절이라고 부르고 (중략) 사방에서 바치는 음식 선물이 넘치게 들어와 썩어서 버리는 고기가 수만 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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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돈중등이 절의 북쪽 산에 그 주변의 백성들을 모아 소나무와 잣나무, 삼나무, 전나무, 등과 기이한 꽃과 풀을 심고 단을 쌓아 왕의 방을 꾸몄는데, 아름다운 색체로 장식하고 괴석을 사용해 섬돌을 만들었다. (중략) 휘장, 장막과 그릇이 사치스럽고 음식이 진기하여 왕이 재상, 신하들과 더불어 매우 흡족하게 즐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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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20
문벌은 과거와 음서를 통해 주요 관직을 독차지하고 다른 문벌이나 왕실과의 혼인을 통해 가문을 유지하며 세력을 확대하였어요, 대표적인 문벌로는 경원 이씨(이자겸), 경주 김씨(김부식, 김돈중) 등이 있어요.
이자겸의 난
인종의 장인이면서 외할아버지였던 이자겸은 고려 왕실과 중첩된 혼인 관계를 맺고 있었어요, 이를 토대로 왕도 함부로 대하지 못할 만큼 막강한 권력을 키웠어요. 이에 인종이 측근 세력과 함께 이자겸을 제거하려고 하자 이자겸은 척준경과 함께 난을 일으켜 궁궐을 불태우고 왕의 측근 세력을 제거한 후 왕을 감금하였습니다. 그러나 부하였던 척준경의 배신으로 난은 실패하였어요.
보수적 유교 사상을 기반으로 하는 김부식 등 개경 세력의 반대로 서경 천도가 어렵게 되자, 묘청 등 서경 세력은 서경에서 국호를 '대위', '연호'를 '천개'로 정하고 난을 일으켰어요. 이들은 1년여간 저항하였으나 결국 김부식이 이끄는 관군에 의해 진압되었어요.
p.121
서경 반란군이 검교첨사 최경을 개경으로 보내 표문을 올려 이르기를, "폐하께서 음양의 지극한 말을 믿읫고 도참의 비서을 고찰하시어 대화궁을 창건하시니 천제의 도읍을 본떠 만드신 것입니다. (중략) 인심은 두려운 것이며 군중의 분노는 막기 어려우니 마ㅓㄴ약 폐하께서 수레를 타고 임하신다면 병란은 그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표문이 도착하니 모두 말하기를, "신하가 감히 군주를 부르다니 그 사자를 베는 것이 옳습니다."라고 하였다.
묘청의 천도 운동에 대하여 역사가들은 단지 왕사가 반란한 적을 친 것으로 알았을 뿐인데, 이는 근시안적인 관찰이다. 실상은 낭가와 불교 양가 대 유교의 싸움이며, 국풍파 대 한학파의 싸움이며, 독립당 대 사대당의 싸움이며, 진취 사상 대 보수 사상의 싸움이니, 묘청은 전자의 대표요, 김부식은 후자의 대표였던 것이다. 묘청의 천도 운동에서 묘청 등이 패하고 김부식이 이겼으므로 조선사ㅏ 사대적, 보수적, 속박적 사상인 유교 사상에 정복되고 말았다. 만약 김부식이 패하고 묘청이 이겼더라면 조선사가 독립적, 진취적으로 진전하였을 것이니 이것이 어찌 일천년래 제일 대사건이라 하지 아니하랴.
대장군 이소응은 무인이지만 얼굴이 수척하고 힘도 약하였는데, 다른 장수와 수박희를 하다가 이기지 못하고 달아났다. 문신 한뢰가 갑자기 앞으로 나서며 이소응의 뺨을 때리자 섬돌 아래로 떨어졌다. 이때 왕과 모든 신하들이 손뼉을 치면서 크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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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이 보현원에 행차하고자 하여 오문 앞에 이르러 신하들과 술을 나우었다. (중략) 어두워지자 왕을 모신 가마가 보현원에 가까이 왔을 때 이고가 이의방과 함께 가서 왕명이라 속이고 순검군을 집합시켰다. 왕이 보현원 문에 들고 신하들이 물러날 무렵에 이고 등이 임종식, 이복기, 한뢰 등을 죽였다. 왕을 모신 문관, 환관 등이 모두 해를 입었다. 또 개경에 있는 문신 50여 명을 죽인 후 정중부 등이 왕을 궁으로 돌려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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엎드려 보건대 적신 이의민은 성품이 사납고 잔인하여 윗사람을 업신여기고 아랫사람을 능멸하여 신기(임금의 자리)를 흔들려고 하였으므로 재앙의 불길이 성하여 백성이 살 수 없었습니다. 신 등이 폐하의 위령을 힘입어 단번에 쓸어버렸으니, 바라건데 폐하께서는 낡은 것을 개혁하고 새로운 정치를 도모하심에 태조의 바른 법을 한결같이 따르셔서 중흥의 길을 빛나게 여시기 바랍니다. 이에 삼가 열 가지 일을 조목으로 아뢰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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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22
최충헌은 이의민을 제거하고 권력을 장악한 뒤 봉사 10조라는 사회 개혁안을 왕에게 올렸어요. 그는 봉사 10조에서 필요 이상의 관원을 도태시킬 것, 토지의 점탈을 바로잡을 것, 조부(세금을 부과하는 일)을 공평히 할 것, 승려를 단속하고 왕실의 고리대업을 금지할 것, 창렴한 주, 군의 관리를 등용할 것, 비보사찰 이외의 사찰을 없앨 것 등을 제시하였으나 제대로 시행되지는 않았어요.
망이의 고향인 명학소를 충순현으로 승격시키고, 내원승 양수탁을 현령으로, 내시 김윤실을 현위로 임명하여 그들을 달래었다.
우리 고향을 현으로 승격시키고 또 수령을 두어 백성을 위로하더니, 돌이켜 다시 군대를 일으켜 토벌하러 와서 우리 어머니와 아내를 옥에 가두었으니 그 뜻은 어디에 있는가? 차라리 칼날 아래에서 죽을지언정 끝내 항복하여 포로가 되지않을 것이며, 반드시 개경까지 가고야말겠다.
정세유 등이 망이, 망소이 등을 체포하여 청주옥에 가두고, 사람을 보내어 승전을 보고하였다.
@고려사
p.122
망이, 망소이 형제가 지배층의 가혹한 수탈과 소 주민에 대한 차별에 저항하여 공주 명학소에서 일으킨 난이에요., 이들의 기세가 커지자 고려 정부는 명학소를 충순현으로 승격시키고 현령과현위를 파견하는 등 회유책을 실시하였어요. 그러나 봉기가 계속되자 군대를 파견하여 토벌하였어요.
명종 23년 7월 남적이 봉기하였다,. 큰 도적인 김사미는 운문에 옹거하고, 효심은 초전에 옹거하며 주현을 노략질하였다. 국왕이 듣고 근심하여 대장군 전존걸 등을 보내어 치게 하였으나, 도리어 패퇴하였다. 24년 2월에 괴수 김사미가 스스로 행영에 와서 투항하였고, 그 후 참하였다.
@고려사
p.122
김사미는 운문에서, 효심은 초전에서 반란을 일으켰어요, 이들은 신라 부흥을 내걸고 봉기하여 세력을 떨쳤으나 결국 실패하였어요.
노비 만적 등 6명이 산으로 나무를 하러 올라가서 노비들을 모아놓고 "우리나라에서는 무신의 난 이후 대신들이 천민에서 많이 나왔다.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있는가! 때만 잘 만나면 우리도 될 수 있는 것이다. 어찌 우리만 주인 밑에서 뼈 빠지게 일만 하겠는가! (중략) 최충헌과 주인들을 죽이고 노비 문서를 불태워 이 땅의 천민을 없애면 우리도 왕후장상이 될 수 있다."라고 말하였다.
@고려사
p.122
무신 집권기 대표적인 하층민의 봉기로, 사노비 만적이 주도하였어요. 만적의 난은 차별적 신분 질서를 극복하려는 신분 해방 운동의 성격도 있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