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부식은 "삼국사기"에서 신라의 역사를 세 시기로 나누었어요. 박혁거세부터 진덕 여왕 때까지를 상대, 무열왕부터 혜공왕 때까지를 중대, 선덕왕부터 마지막 경순왕 때까지를 하대로 구분하였습니다. 이후에 일연은 "삼국유사"에서 불교식 왕명을 썼던 법흥왕부터 진덕 여왕까지의 시기를 중고라 하여 새롭게 시기를 구분을 하였습니다.
진덕왕이 죽자, 여러 신하들이 이찬 알천에게 섭정하기를 청하였다. 알천이 한결같이 사양하며 말하기를, "신은 늙고 이렇다 할 만한 덕행도 없습니다. 지금 덕망이 높은 이는 춘추공만한 자가 없습니다. 실로 가히 빈곤하고 어려운 세상을 도울 영웅호걸입니다." (중략) 김춘추는 세 번 사양하다가 부득이하게 왕위에 올랐다.
@삼국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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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열왕은 김유신의 지원을 받아 진골 출신으로는 처음 왕위에 올랐어요. 이후 그의 직계 자손이 왕위를 세습하였어요. 무열왕이 시작한 통일 전쟁은 그의 아들 문무왕 때 삼국 통일의 결심을 맺었습니다.
삼국 통일을 완성한 문무왕은 민족 통합과 민생 안정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어요. 문무왕은 "나는 죽은 뒤 동해의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겠다. 그러니 죽은 후 화장하여 동해 바다에 장사 지내라."라는 유언을 하였다고 해요. 그래서 문무 대왕릉은 다른 왕들의 릉과는 달리 바다에 있습니다.
통일 후 신라는 전국을 9개 주로 나누고, 복원경(원주), 중원경(충주), 서원경(청주), 남원경(남원), 금관경(김해) 등 5개의 소경을 두었어요. 5소경은 군사, 행정상의 요충지에 설치되었으며, 이곳으로 옛 고구려와 백제 출신 귀족을 옮겨 살게 하였습니다. 5소경은 수도인 금성(경주)이 동남쪽에 치우쳐 있는 것을 보완하고, 피정복민을 회유, 감시하며, 지방을 균형 있게 발전시키기 위해 설치외었어요.
p.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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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사부, 시중
집사부는 기밀 사무를 관청하면서 왕명을 집행하는 일을 맡은 부서이며, 시중은 집사부의 우두머리예요.
p.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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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료전
관료전은 녹읍처럼 관리에게 일정한 토지를 지급한 것이지만 녹읍과 달리 조세만 거둘 수 있었어요.
p.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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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읍
녹읍은 관리에게 녹(봉급)으로 읍(지방 행정 구역)을 지급한 것으로ㅡ 해당 토지의 조세와 공납뿐만 아니라 노동력까지 수취할 수 있었어요.
p.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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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학
왕권을 뒷받침할 인재를 육성하고자 신문왕이 설립한 통일 신라의 최고 교육 기관으로, 유학을 가르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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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의 귀족 회의
제천 회의: 고구려에서 국가의 주요 사안을 논의하던 귀족 회의로, 부족 국가 시기부터 운영되었어요. 중앙 집권 체제가 정비되면서 약화 되기는 하였으나, 고구려가 멸망할 때까지 유지되었어요.
정사암 회의: 정사암(천정대)이라는 바위에서 정치를 논의하고 재상을 뽑던 백제의 귀족 회의예요.
화백 회의: 신라에서 중요 사항을 합의하여 처리한 회의로, 씨족 사회의 전통을 계승하였어요, 만장일치제로 처리하는 것이 특징이며, 화백 회의의 장은 상대등이 맡았어요.
신문왕 원년에 소판 김흥돌, 파진찬 흥원, 대아찬 진공 등이 모반을 일으키다가 죽임을 당하였다. 왕이 교서를 내렸다. (중략) 적괴 흠돌, 흥원, 진공 등은 벼슬이 재능으로 올라간 것이 아니라 왕의 은혜를 입어 올라간 것인데 제 마음대로 위세를 부리더니 (중략) 온갖 악인들과 서로 도와 기일을 정하여 반역을 하려 하였다. (중략) 이에 병사들을 모아 역적들을 업애려 하니, 어떤 자는 산골짜기로 도망가기도 하고 어떤 자는 왕실에 투항하였다. 철저히 수색하여 남은 무리를 모두 찾아 죽였다.
신문왕은 김흠돌의 반란을 계기로 진골 귀족 세력을 진압한 후 왕권을 강화하고 통치 체제를 정비하기 위해 적극적인 개혁 정책을 실시하였어요. 늘어난 백성과 영토를 효율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중앙 정치 기구(집사부 등 14부)와 지방 행정 조직(9주 5소경), 군사 조직(9서당 10정) 등 중앙 집권적 통치 체제를 정비하였습니다. 또한, 국학을 설치하여 유교적 소양을 갖춘 인재를 양성하였습니다.
해관 박숙청이 아뢰되, "동해에 작은 산이 떠서 감은사로 향하여 오는데 물결을 따라 왕래합니다."라고 하였다. (중략) 국왕이 배를 타고 그 산에 들어가니, 용이 나타나 "동해의 용이 된 그대의 아버지인 문무왕과 천신이 된 긴유신이 그대에게 옥대와 대나무를 전해 주라고 하였다."라고 하였다. 국왕이 놀라고 기뻐하야 대나무를 베어서 피리를 만들었다. (중략) 이 피리를 불면, 적병이 물러가고 병이 나으며, 가뭄에는 비가 오고 장마는 개며, 바람이 잦아들고 물결이 평온해졌으므로 이를 만파식적이라 부르고 국보로 삼았다.
혜공왕 4년 7월 3일에 대공 각간의 적도(도둑 무리)가 일어나자 왕도 및 5도 주군의 96각간이 서로 싸우게 되어 크게 어지러워졌다. (중략) 난리는 석 달이 지나서야 그쳤다.
@삼국유사
헌덕왕 14년 3월, 웅천주 도둑 헌창은 그 아비 주원이 앞서 왕위에 오르지 못한 것을 이유로 반란을 일으켜 국호를 장안이라 하고 연호를 경운 원년이라 하였다. 무진주, 완상주, 청주, 사벌주 등 4개 주 도둑과 국원경, 서원경, 금관경의 사신 및 여러 군현의 수령을 협박하여 자기 소속으로 삼았다.
@삼국사기
신라 말에 사회 분위기가 혼스러운 가운데 지방에서는 호족들이 등장하였어요. 호족은 6두품 출신의 유학자나 선종 승려와 손을 잡고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고자 하였습니다. 이 중에서 상주 출신의 지방 세력 견훤과 신라 왕족 출신이라고 알려진 궁예는 세력을 모아 각각 나라를 세웠어요 . 완산주(전주)를 도읍으로견훤이 후백제를, 송악(개성)을 도읍으로궁예가 후고구려를 건국하게 하면서 경상도 일대를 축소된 신라와 함께 후삼국을 이루었습니다. 후백제는 충청도와 전라도의 경제력을 바탕으로 우위를 확보하였으며, 중구그이 후당, 오월과 외교 관계를 맺었어요. 또 '정개'라는 연호를 사용하였습니다. 후고구려는 '마진'으로 국호를 바꾼 후 '무태'라는 연호를 사용하였으며, 이듬해 수도를 철원으로 옮겼어요. 이후 또다시 국호를 '태봉'으로 바꾸고, '수덕만세'와 '정개'라는 연호를 사용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