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이왕 27년(260), 내신좌평을 두어 왕명 출납을, 내두좌평은 물자와 창고를, 내법좌평은 예법과 의식을, 위사좌평은 숙위 병사를, 조정좌평은 형벌과 송사를, 병관 좌평은 지방의 군사에 관한 일을 각각 맡게 하였다. (중략) 왕이 영을 내려 6품 이상은 자줏빛 복장을 입고 은꽃으로 관을 장식하고, 11품 이상은 붉은 복장을, 16품 이상은 푸른 복장을 입게 하였다. (중략) 고이왕 29년(262), 정월에 영을 내려, 무릇 관인으로서 재물을 받은 자와 도적질한 자는 장물의 3배를 징수하고, 종신 금고하게 하였다.
@삼국사기
p.48
고이왕은 왕을 정점으로 한 위계질서를 확립하기 위해 관동제와 관복제를 제정하였어요. 왕 아래 6좌평을 비롯한 16등급의 관리를 두어 행정을 담당하게 하였고, 관리들 간의 등급 차이를 옷으로 구분하는 관복제(자색, 비색, 청색)를 제정하였습니다.
근초고왕 24년(369), 왕이 강진, 보성, 나주(전라남도 남부 지방) 등 여러 지역을 공격하였다. 이로써 마한이 완전히 멸망하였다.
근초고왕 26년(371), 고구려가 군사를 일으켜 오자 왕이 패하(예성강)에 군사를 매복시켜 공격하니 고구려군이 패하였다. 그해 겨울 왕이 태자와 함께 정병 3만을 거느리고 고구려에 침입하여 평양성을 공격하였다. 고구려 왕(사유, 고국원왕)이 이를 막으려다가 활에 맞아 죽었다.
@삼국사기
p.48
한강 유역에서 건국된 백제는 4세기 근ㅊ고왕 때 전성기를 맞았어요. 근초고왕 때 백제는 마한을 정복하고 고구려를 공격하여 황해도 지역까지 영토를 확장하였어요. 근초고왕은 평양성을 공격하여 고국원왕을 전사시켰으며, 중국의 동진과 외교 관계를 맺고 일본의 규슈 지방과 활발히 교류하였습니다.
왕(개로왕)이 북위에 사신을 보내 말하였다. "우리나라는 고구려와 더불어 근원이 부여에서 나왔다. 전에는 고구려가 옛 우의를 굳게 지키더니 점차 (중략) 백제를 압박하고 외교를 방해하였다. 이로 인해 위례성이 함락될 위험에 처하였다."
@삼국사기
p.48
427년에 고구려의 장수왕이 평양으로 도읍을 옮기자 백제는 큰 위협을 느꼈어요. 이에 대항하여 백제는 왜, 가야, 신라 등과 우호 관계를 형성하고, 중국과의 외교도 강화하였어요. 개로왕 때 북위에 사신과 원병을 요청하는 국서를 보내기도 하였으나 실패하였습니다. 결국 고구려의 침입으로 수도 한성이 함락되고 개로왕은 살해되었어요(475), 이후 개로왕의 아들 문주왕이 즉위하여 웅진(공주)으로 수도를 옮겼습니다.
백제는 한성 시기에 한가 ㅇ유역을 발판으로 빠르게 성장하였으며, 활발한 정복 활동을 전개하고 대외 교류를 확대하였어요. 그러나 고구려 장수왕의 남진 정책으로 한성을 빼앗기고 웅진으로 도읍을 옮기게 되었어요(475)., 이후 서오앙 때 대외 진출에 유리한 사비(부여)로 도읍을 옮기고 국호를 '남부여'라고 하였어요(538).
성왕32년(554) 7월 왕이 신라를 습격하기 위하여 친히 보병과 기병 50명을 거느리고 밤에 구천(충북 옥천 부근)에 이르렀다. 신라의 복병이 나타나 싸우다가 왕이 난병들에게 살해되었다. 시호를 성이라 하였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진흥왕 15년(554) 백제 왕 명농(성왕)이 관산성(충북 옥천)을 공격하였다. (중략) 신주의 군주 김무력이 주의 군사를 이끌고 와서 교전하였는데, 비장인 삼년산군(충북 보은)의 고간 도도가 급히 쳐서 백제 왕을 죽였다. 백제의 좌평 4명과 병사 2만 9천 6백 명을 베어 죽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p.48
백제의 중흥을 이끌었던 성왕은 신라와 연ㅇ합하여 고구려로부터 한강 하류 지역을 되찾았어요(551). 그러나 신라 진흥왕의 기습 공격을 받아 다시 이 지역을 빼앗겼습니다. 이로써 120여 년간 지속되었던 나-제 동맹이 파기되고, 신라와 백제는 대립하게 되었습니다. 백제는 대가야와 연합하여 신라를 공격하였는데, 관산성(충북 옥천) 전투에서 성왕과 백제군 3만여 명이 전사하는 큰 피해를 입었어요(554).
의자왕이 장군 윤충을 보내 군사 1만 명을 거느리고 신라의 대야성을 공격하게 하였다. 성주 품석이 처자를 데리고 나와 항복하자 윤충이 그들을 모두 죽이고 품석의 목을 베어 왕도에 보냈다.
@삼국사기
의자왕은 또한 당나라와 신라 군사들이 이미 백강과 탄현을 지났다는 소식을 듣고 장군 계백을 시켜 결사대 5천 명을 거느리고 황산으로 가서 신라 군사와 싸우게 하였는데, 4번 싸워서 모두 이겼으나 군사가 적고 힘이 모자라서 마침내 패하고 계백이 사망하였다.
@삼국사기
p.48
백제의 마지막 왕인 의자왕은 신라를 공격하여 40여 개의 성과 전략적 요충지인 대야성을 빼앗아 영토를 확장하고 백제 부흥을 위해 힘썼습니다(642). 그러나 지배층의 분열로 정치가 혼란한 가운데 660년 신라와 당의 연합군이 백제를 공격해 오자, 의자왕은 계백이 이끄는 결사대를 보내 항전 하였지만 패하였습니다(황산벌 전투). 이후 수도인 사비성이 함락되고 의자왕이 항복하면서 백제는 멸망하였습니다.
흑치상지가 좌우의 10여 명과 함께 [적을] 피해 본부로 돌아가 흩어진 자들을 모아 임존산을 지켰다. 목책을 쌓고 굳게 지키니 열흘 만에 귀부한 자가 3만여 명이었다. 소정방이 병사를 보내 공격하였는데, 흑치상지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막아 싸우니 그 군대가 패하였다. 흑치상지가 본국의 2백여 성을 수복하니 소정방이 토벌할 수 없어서 돌아갔다.
@구당서 흑치상지 열전
손인사, 유인원과 신라왕 김법민은 육군을 거느려 나아가고, 유인궤와 별수 두상과 부여융은 수군과군량을 실은 배를 거느리고 웅진강에서 백강으로 가서 육군과 합세하여 주류성으로 갔다. 백강 어귀에서 왜국 군사를 만나 네 번 싸워서 모두 이기고 그들의 배 4백 척을 불사르니 연기와 불꽃이 하늘로 오르고 바닷물은 붉은 빛을 띠었다.
@삼국사기
p.48
사비성이 함락된 이후 흑치상지는 임존성을 거점으로 부흥 운동을 일으켰고, 북신과 도침은 주류성에서 왜에 있는 의자왕의 아들 부여풍을 왕으로 추대하여 백제의 부흥을 도모하였어요. 백제 부흥군은 임존성에서 소정방이 이끄는 당군을 격퇴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지도층의 분열로 세력이 약화되었고, 백제 부흥군을 돕기 해 파견된 왜의 수군과 백제 부흥군이 백강 전투에서 나-당 연합군에게 패하면서 백제 부흥 운동은 실패하였습니다.